본문 바로가기
Untitle/ETC

[사물] 잔인? 인도적? 사형도구, 단두대

by 류군 2022. 7. 25.
반응형

 

단두대,斷頭臺

프랑스 혁명 당시 발명된

사형기구를 말한다.

본래는 조제프이냐스 기요탱의

이름을 따서

기요틴으로 부르는게 맞지만

용도를 통해 의역해

단두대로 불리고 있다.

실제 설계 측면에서는

'앙투안 루이'의 영향이 커서

루이제트로 불리다가

언론에 의해 기요틴이 홍보되면서

기요틴으로 알려져 있다.


조제프이냐스 기요탱

 

해부학 박사였던 기요탱 박사는 귀족이지만

평소 평등에 많은 관심이 있던 사람이었다.

본래 사형을 반대하는 입장이었던

기요탱 박사는 혁명 시기에

유례 없이 사형 대상이 많아지자

타협책으로 사형수들의 고통을 줄여주기 위해

두대를 사형 도구로 활용하게 된 것이다.


망나니로 알려진 사형집행인

 

단두대의 도입은

사형집행인들을 생각해서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실제로 참수형은

물리적으로 전문 기술과 전문 도구가 필요하고,
집행인이 직접 살인을 해야 하기 때문에

사형집행인의 정신적 고통 역시 상당했다.
하지만 단두대는 높이 있는

칼날의 운동에너지를 활용하기 때문에
기술도 인력도 특별히 필요하지 않았고,

사형집행인의 정신적 고통도 줄일 수 있었다고 한다.


 

같은 죄를 지었다면

지휘고하를 막론하고

동일한 형벌을 받는 것은 지금은 당연한 일이지만
당시까지는 참수형에 있어서

뇌물을 줄 수 있는가에 따라

고통의 양이 달랬다고 한다.
돈이 많아야

실력 있는 사형집행인을 고용할 수 있었고,

쉽게 한 방에 갈 수 있었다고 한다.


 

기요틴의 도입에는

사실 격렬한 반대가 있었다고 한다. 
바로 기요틴으로 처형하면

일반적인 참수형보다 덜 고통스럽다는 것이다.
유럽을 비롯한 많은 전근대 국가에서

'사형집행'은 마을 사람에게

오랜 오락 중 하나였다고 한다.
여러 속설을 듣고

사형수의 피를 가져가려고 노력하는 등

하나의 스포츠를 보는 것처럼 생각했기 때문에
반대에 부딪히지만

앞서 언급했던 이유 덕분에 결국 수용되었다고 한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프랑스 혁명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처형되었지만
그중에서도 유명한 사람들은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일 것이다.
프랑스 혁명을 통해

자국 민중들의 봉기로 왕과 왕비가 처형되고
평민들이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제를 수립했기 때문에

주변국들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로베스피에르와 생쥐스트

 

로베스피에르와 생쥐스트는

프랑스 혁명 당시 자코뱅파의 수장들이자
국민공회를 중심으로

공포정치를 이끈 정치인들이다.
생쥐스트의 경우 죽음의 대천사,

단두대의 대천사라 불릴 정도로

수많은 처형을 진행하였는데,
결국은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공포정치를

이끈 자신들도 단두대에서 처형당하게 되었다.


라부아지에

 

'화학의 아버지'라고 알려진

앙투안 라부아지에 역시 단두대에 처형되었다.
질량 보존의 법칙을 발견하고,

현대의 미터법 제정을 주도하고,
화학을 연금술과 분리하여

진정한 독립학문으로 만들어서

'화학 혁명'이라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징세 청부업자 일하면서

대중들의 미움을 사게 되고,
결국 '불법 징세'라는

죄목으로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프랑스혁명의 시작, 테니스코트 서약

 

혁명의 시작, 테니스 코트의 맹세
추가로 '단두대의 발명자는

단두대에서 처형당했다.'라는 말이 있지만
기요탱 박사는 물론,

앙투안 루이 역시 처형당하지 않았다고 한다.
귀족이었던 기요탱 박사는

삼부회 의원들이 모일 수 있도록

테니스코트 장소를 마련해주는 등
혁명을 지지했고,

나폴레옹 정권 시절에는

고위직에 오를 정도로 잘 살다가 죽었다고 한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