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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노사의 굴욕은

'카노사의 굴욕'이 일어나게 된
배경에는 '서임권 투쟁'에 있다.
성직자를 임명하는 권리인
서임권은 원칙적으로는 교회의 일이지만
주교와 대수도원장 등 고위 성직자는
직위에 따른 토지와
세속 직무도 수행했기 때문에
교황이 임명하는게 아닌
세속 권력(황제, 왕)에 의해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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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부패와 타락을 세속에서
임명하는 성직자들로 보고
<교황 지령>을 발표하고
서임권을 교회로
다시 가져오려고 시도하였다.
당연히 신성 로마 제국 황제였던
하인리히 4세는 이에 격분했고
그레고리우스 7세는 황제를 파문하기에 이른다.
6. 교황이 파문한 사람들과는 한 지붕 아래에서 살 수 없다.
12. 교황은 황제를 해임할 수 있다.
14. 교황은 어떤 교회의 성직자라도
교황이 원하는 다른 교회의 성직자로 임명할 권리가 있다.
19. 어느 누구도 교황을 심판할 수 없다.
22. 로마 교회는 결코 과오를 범한 일이 없다.
그리고 성서의 증언에 따라서
앞으로도 결코 과오를 범하지 않을 것이다.
26. 로마 교회와 함께 하지 않는 자는
카톨릭 신자로 여기지 않는다.
27.신하가 의롭지 않은 자에게
충성서약을 했을 경우에,
교황은 그 신하의 서약을 해제시킬 수 있다.
교황지령(1075) 중 일부 / 전체는 총 27개 조항
<교황 지령>은 그레고리우스 7세가
교황청 개혁을 실시하면서 발표한 지령이다.
교황의 엄청난 권리를 보여주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이런 권리가 없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교황이 황제에게
할 수 있는 '필살기'인 파문을 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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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의 필살기 격인 '파문'은
중세 시대에서는
개인을 비종교인으로 만드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라 자체를 교회에서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사실 신성 로마 제국의 황권은
교황이 건드린다고 꿈쩍할 정도도 아니었다.
하인리히 4세의 친부인 하인리히 3세는
재위 기간 중 교황을 3번 바꿀 정도로
사실상 신성 로마 제국의 황권에
교황이 종속되어 있는 위치였는데
문제는 황제 본인이 아닌 독일의 다른 제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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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리히 4세의 강한 황권 때문에
독일 제후들의 위기감은
제국 각지에서 황제의 파문을 구실로
동시다발적으로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또한 새로운 황제를 추대할 움직임마저 있자,
하인리히 4세는 어쩔 수 없이
교황에게 용서를 구할 수 밖에 없었다.
황제는 교황에게 사자를 보내
아우구스부르크에서 만나자고 했지만
교황은 위협으로 느껴 거부한 뒤
카노사 성으로 피난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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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6년 겨울 하인리히 4세는
어쩔 수 없이
직접 이탈리아에 있는
카노사 성으로 가게 된다.
독일왕이 아닌
자비를 구하는 고해자의 모습으로
카노사에 간 하인리히 4세는
수도사들이 입는 거친 옷과
신발을 신지 않은 맨발로
카노사 성문 앞에 도착했다.
그레고리우스 7세는
하인리히 4세의 모략으로 판단해
계속 만남을 거부하다가
3일만에 이를 받아드리고
파문을 취소하게 된다.
카노사의 굴욕으로
교황의 사면을 받은 하인리히 4세는
신성 로마 제국으로 돌아가
반란 진압에 집중한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는
양측의 중재자 역할을 자임했지만
양측 모두는 물론 중립세력까지
교황의 태도에 분노했고
중재자 역할은 의미가 없어졌다.
결국 하인리히 4세의 승리로 내전은 종료되었다.

내란을 끝낸 하인리히 4세는
귀족들을 굴복시키고 독일 내 권력장악에 성공한다.
이에 그레고리우스 7세는
다시 한번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하지만
이제는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하인리히 4세는 그레고리우스 7세를 폐위시키고
클레멘스 3세를 새 교황으로 옹립하게 된다.
산탄젤로성에 은신한 그레고리우스 7세는 위협을 느끼고
남부 이탈리아의 지배자 로베르에게 구조 요청을 하게 되고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로 향하던
하인리히 4세는 이에 퇴각하게 된다.
로베르에게 구출된 그레고리우스 7세는
1년 뒤 먼 타지인 살레르노(로베르의 영역)에서 죽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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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하자면 하인리히 4세가
카노사에서 굴욕을 겪었지만,
결국 그레고리우스 7세를 폐위하고 쫓아냈으니
하인리히 4세의 승리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하인리히 4세의 승리와는 무관하게
후대에는 원인이 되었던 서임권은
교회가 가져가게 되면서
최종 승자는 교회가 되긴 하였다.


우리의 영혼과 몸, 둘다 카노사에 가지 않을 것이다.
비스마르크, 히틀러
또한, 세속의 권력에 대해
교황권력이 승리를 거둔 것은 아니지만,
카노사라는 이름은
세속적 권력의 기독교에 대한 굴복을
상징적으로 의미하게 되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카노사로 가다'가
굴복, 복종, 항복을 뜻하게 되어
싫지만 억지로 굴복해야하는 상황을
나타내는 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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