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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title/사건

[사건] 2년에 걸친 전국적 재앙, 경신대기근

by 류군 2022. 7.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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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밤에 유성이 하고성 위에 나왔는데
꼬리가 길고 색깔이 붉었다.
현종 11년 (1670) 1월 10일

 

167019

한 유성이 평안도에 떨어졌다.

예로부터 하늘에

뭔가 다른 것이 보이면

큰일이 날 징조로 여기던

국왕과 신하들은 크게 놀랐고,

사헌부 장령 이관적은

"위망의 모양이고 쇠란의 징조다."라 평했다.

이후 2년을 암시하듯

9일을 시작으로

10, 13, 21일 계속해서 떨어졌다.

그렇게 경신대기근은 시작된다.


 

현종 11년과 12년에 일어난

경신대기근은 전례없는 '재앙 그 자체' 였다.

오해하기 쉽지만 경신대기근은

1670년 경술년(庚戌)

1671년 신해(辛亥)년의

앞 두 글자를 따서

'경신(庚辛)대기근'이라 부른다.


 

경신대기근의 원인으로는

17세기의 소빙하기를 뽑곤 한다.

지구의 평균 기온이 2~3도 내려가서

농업 생산량과 어류 움직임 등이

크게 변하는 사태를 말한다.

그 실체에 대해서는

기후학자나 역사학자들 역시 논란이 많지만

17세기에 유럽의 마녀사냥,

청교도혁명, 명예혁명, 30년 전쟁 등의

간접적인 원인으로 지목되고

에도 막부에서 일어난

텐메이 대기근 역시

소빙하기를 원인으로 지목하고 있다.


햇무리와 달무리

 

1670년에는 유성들의 영향으로 먼지가 일어

햇무리와 달무리가 반복적으로 발생했다.

보통은 다음날 큰 비가 내리거나,

큰 먼지가 있다는 징조로 판단되지만

계속해서 관측되는 햇무리와 달무리는

유성들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재앙이 시작된다.


 

재앙의 시작점을 알린 것은

바로 지진이었다.

1월 전라도 영암과 영광에

지진이 발생했다.

이윽고 경기도 교동,

통진과 경상도 안음,

거창에서도 지진이 발생했다.


 

그리고 이제는 빠지면

섭한 전염병도 시작된다.

충청도에서 전염병이 시작되어

513명이 통증을 호소하고,

30명이 사망하기에 이르렀다.

전라도에서도 598명이 감염되고

43명이 죽는 등

심각한 피해를 끼치기 시작한다.


 

2월부터 전염병은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이윽고 본격적인 가뭄이 시작된다.

농경국가였던 조선에게

가뭄은 치명적이었는데,

모내기가 이뤄지는 시기에도

비가 오지 않아

작물을 파종하는 일은 접어야했고,

우물과 냇가도 말라가기 시작되었다.


 

4월에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고

악화만 되었는데,

비는 계속해서 내리지 않았고

밤만 되면 서리까지 내려

그나마 심었던 작물도

냉해를 입게 되었다.

그냥 1년 농사는 끝난 것이었다.


 

그리고 내리라는 비는 내리지 않고

우박이 내리기 시작하였다.

곡식들은 모조리 죽어갔고,

4살짜리 아이가

우박에 맞고 죽기도 하였다.

수 많은 동물들도

우박에 맞고 죽었고

그 크기가 오리알만했다고 한다.


 

큰 비가 내렸다.
이때 크게 가물어
곡식들이 자라지 못하였는데,
팔도가 마찬가지였다.
이제 비로소 비가 내렸으나 이미 늦어
농사가 마침내 대흉작이 되었다.
[현종실록] 현종 11년 5월 24일 1번째 기사

 

이미 농사는 물 건너갔지만,

2월부터 시작된

길고 긴 가뭄이 끝이 났다.

3월 이후 계속해서

조정은 몇 번이고 기우제를 지내왔다.

참혹하던 가뭄이 계속되다가

5월 말에 드디어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전라도에 큰 비가 연일 내려
들판이 시내가 되었다고 감사가 보고하였다.
[현종실록] 현종 11년 6월 1일 3번째 기사

 

경기에 수재가 참혹하다고
감사가 보고하였다.
[현종실록] 현종 11년 6월 1일 3번째 기사

 

함경도의 수재가 매우 참혹하다고
감사가 치계하였다.
[현종실록] 현종 11년 7월 1일 1번째 기사

 

불과 한 달전까지 기우제를 지냈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이번에는 홍수가 찾아왔다.

가장 홍수 피해가 심했던

전라도를 시작으로

전국으로 퍼진 홍수는 참혹하기 그지 없었다.

조정은 다시 기청제를 시작하게 되었다.

한 달 전까지 기우제를 지내다가

장마를 멈춰주라고

비는 기청제도 하게 된 것이다.


 

조정의 기청제에도

폭우와 강풍을 동반한 초대형 태풍이

제주도와 경상도 남해안 일대를 휩쓸었다.

제주도는 피해가 극심하였는데,

해일로 짠 바다가 산과 들로 밀려왔고

수많은 작물은 소금물에 절어 말라 죽었다.

농작물은 물론 풀뿌리 하나 남지 않았다고 한다.

이 때, 파도가 극심해서 숨을 쉬면

짠 소금 맛이 날 정도였다고 한다.


 

전근대 농업에 있어

가장 심각한 해충, 황충도

이에 질세라 날뛰기 시작했다.

경기도에서 발견된 황충무리는

함경도에도 퍼져 각종 곡식을 먹어치웠고,

곡식은 커녕 구황작물로 평가되는

도토리나 밤도 열리지 못하게 되었다.


 

구제역도 창궐했다.

황해도에서 7월 한 달에만

897마리의 소가 폐사했고

피해는 계속되어

22165마리가 폐사했다.


 

8월이 되었지만 냉우도 시작되었다.

냉우는 '차가운 비'를 말하는데

우박과 번갈아 내리며

많은 사람들이 우박에 맞아 죽고

물에 빠져 죽어나갔다.

태풍도 계속되어

마지막 희망에 가까웠던

밀과 보리마저 씨가 말라버렸다.

앞서 퍼졌던 전염병도

기세가 계속해서 거세졌다.


 

1670년 한 해 동안

냉해, 가뭄, 수해, 풍해, 병충해 등등

총체적인 자연 재해가 조선을 덮쳤다.

전국의 고을은 대흉작을 맞이했고,

전대미문의 사태를 맞이한 백성들은

굶주렸고 이들은

가만히 앉아서 굶어죽지 않기 위해

떠돌아다니기 시작했다.

7월부터 발생한 아사자는

8월부터 급증하기 시작되었다.

극심한 기근에 조정은

그동안 막아두었던 소 도축도 허용했지만,

이미 도축은 널리 퍼져있었고

구제역으로 죽은 소를 파내서 먹기도 하였다.

또한, 극심한 굶주림 이후

갑자기 먹게 된 소고기에

소화하지 못하고 죽는 사람도 급증하였다.


 

그렇게 끔직했던 경술년이 지나가고

신해년이 되었지만 상황은 나아질 수가 없었다.

봄이 되자 보리 수확을 기대했지만

아사자는 더욱 늘어나

수천, 수만 단위로 보고되었고

어딜 가던 굶어 죽은 시체가 길거기를 매웠다.


 

조정은 진휼소를 열어

사태를 진정시키고자 하였다.

그러자 전국의 유민들이

서울로 몰려들었다.

서울은 그렇게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는데

유민들은 오랫동안 굶어

면역력이 떨어졌고,

쉽게 사망하고 전염병의 보균자였다.

전국에서 모여든 유민들은

서울에 전염병을 퍼트렸다.

서울 시민, 양반, 군인도 피해갈 수 없었다.

임금의 다섯째 누이인 숙경공주도

전염병으로 죽게 되고

진휼소의 움막에서 죽어가는 자는

셀 수 없을 정도였다.


 

지방의 수 많은 관청은

텅 비게 되었고 행정 공백이 발생했다.

역참 또한 정상적으로 돌아갈 수 없었고

많은 관리들은 갖은 핑계를 대며

사직서를 내고 서울을 탈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조선은 이미 전국이 지옥이었다.

 

"선산부의 한 여인은
그의 여남은 살 된 어린 아들이
이웃집에서 도둑질하였다하여
물에 빠뜨려 죽이고,
또 한 여인은
서너 살 된 아이를 안고 가다가
갑자기 버리고 돌아보지도 않은 채 갔으며,
금산군에서는 굶주린 백성 한 사람이
죽을 먹이는 곳에서
갑자기 죽었는데 그의 아내는
옆에 있다가 먹던 죽을
다 먹고 나서야 곡하였습니다.
하늘에서 부여받은
인간의 윤리가 완전히 끊겼으니,
실로 작은 걱정이 아닙니다."
[현종개수실록] 현종 12년 4월 5일 4번째 기사

 

유교의 나라 조선에서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패륜 사건들이 속속 보고되었다.

아이를 버리는 것은 물론,

남편이 죽어도

먹던 죽을 다먹고 곡을 할 정도로

'굶주림' 앞에서

인륜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충청 감사 이홍연이 치계하기를,
"연산에 사는 사가의 여비 순례가
깊은 골짜기 속에서 살면서
그의 5살 딸과 3살 아들을
죽여서 먹었는데,
같은 마을 사람이 전하는 말을 듣고
가서 사실 여부를 물었더니
‘아들과 딸이 병 때문에 죽었는데
큰 병을 앓고 굶주리던 중에
과연 삶아 먹었으나
죽여서 먹은 것은 아니다.’고 하였다 합니다.
[현종실록] 현종 12년 3월 21일 2번째 기사

 

식인도 시작되었다.

평소였다면 나라 전체가 뒤집힐 사건이었지만,

승정원에서 굶주림이 절박하고

진휼이 허술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평할 정도로

나라의 상황은 심각했다.


이런 상황은 태어난 뒤로 보거나
들어본 적이 없는 것으로서
참혹한 죽음이 임진년의 병화보다도 더하다.

 

가엾은 우리 백성들이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아, 허물은 나에게 있는데
어째서 재앙은 백성들에게 내린단 말인가.
[현종개수실록] 현종 11년 5월 2일, 왕의 자책

 

기근이 일어나기 전

1669년 기준 조선 인구는 공식적으로 516만 명이다.

노예나 머슴, 유랑민까지 포함한다면

최대 1500~1600만 명으로 추정된다.

윤경교는 이때까지의

사망자 100만 명을 상회한다고 보고했다.

물론 추정치이고

실제 규휼소에서

사망한 인원은 85천이지만

지방 수령들이 축소 보고했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실제 사망자는 최소 20~30,

최대 40~85만 명으로 판단하고 있다.

대기근 2년 동안 인구의 절대 다수가

기아를 직접 경험하고

전체 인구의 1.5%~5%

가까운 사람들이 사망한 것이다.


 

전국을 휩쓴 생지옥에 가까운

재앙이 지나가고

조선에는 많은 변화가 시작된다.

첫번째로는 추위를 견디고

체력을 보존하기 위해

온돌이 전국적으로 보급되기 시작된다.

조선 전기까지 남아있던

2층 한옥은 이러한 흐름 속에 사라지고

그 결과 흔해진 온돌에 의해

땔감의 필요성도 늘어나

조선의 산림자원이 고갈되기 시작한다.


 

두 번째로는 많은 사람들이

만주로 진출하게 된다.

미개척지였던

만주로 많은 사람들이 이주했고,

모피와 인삼을 찾아

북방으로 향한 사람들도 있었다.

이로써 청나라와 국경 분쟁이 일어나고

백두산 정계비가 세워지기에 이른다.


 

다른 변화로는 조선의 체제에

불만세력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조선 3대 도적 중 하나로 알려진

장길산도 등장했고,

이제까지 조선을 지배한 유교에서 벗어나

비기, 도참, 미륵 신앙이 성행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 시기에는 북쪽에서도 한양으로 모였다.

또한 본격적으로 한양에

사람이 몰리기 시작하였다는 말도 있다.

대기근 당시 구휼 체계가

마지막까지 작동하던

한양으로 사람들이 모였고

이를 계기로 지방민들이

서울 외각 지역인

성저십리로 모여들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의 시대적 배경이

경신대기근과 매우 닮아있다.

[킹덤]의 김은희 작가가 밝힌 것처럼

[킹덤]'배고픔'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이상 저온 현상과 넘쳐나는 아사자들은

경술년과 신해년의 모습이

많이 닮아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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