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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title/사건

[사건] 홈메이드 강철로 공업화를? 토법고로

by 류군 2022. 9.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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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약진 운동

1958년부터 1962년 초까지

마오쩌둥의 주도로 시작된

중국의 농공업 대증산 정책이다.

바로 이전 포스팅이었던

제사해 운동도 대약진운동의 일환이며

오늘의 주제 '토법고로'

역시 대약진운동의 일환으로 실시되었다.


 

짧은 기간 안에 선진 공업국으로

탈바꿈한 소련을 볻받기 위해

소련에서 많은 원조를 받고,

소련의 기술자들을 고용하던 중국은

소련 내 니키타 흐루쇼프의 취임과 함께

소련과의 관계가 틀어지기 시작했다.

이에 마오쩌둥은 기계보다

인력에 의존하는 노동집약적인

산업화 방안을 내세웠는데

'100명의 농민이 1개의 트랙터를 대신한다.'

시대역행적인 전략을 선택하게 된다.

 

집마다 뒤뜰에 토법고로를 지어서
대규모 용광로 없이도 강철 생산량을 늘릴 수 있다.

마오쩌둥의 주장

 

역사상 유례없는 속도로

최대한 빨리 발전시킨다는 미명하에

9천만 명의 농민들이 동원된 토법고로는 시작된다.

주변 산림을 벌목해

토법고로에 넣고

잡다한 철들을 넣어 철을 생산하기 시작한다.

 

 
 

이처럼 작은 뒤뜰 용광로에서
이렇게 많은 철을 생산할 수 있는데
왜 외국인들은 거대한 제련소를 건설하지?
참으로 한심하군!

마오쩌둥이 생산된 엄청난 양의 철을 보고 수행원에게

 

토법고로는 마오쩌둥이

중일전쟁 기간 겪은 경험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일본군의 교통망을 파괴하기 위해

절단한 철도의 레일을 활용해

당시 활용되던 89식 척탄통를

다수 복제했던 경험이 있었던 것이다.

정제된 철을 녹여 다시 활용하는 것과

고철을 녹여 사용하는 것이

같다고 생각해버린 것이다.

현재에도 거대한 제철소에서도

까다로운 정제과정을 거쳐 생산되는 철이

홈메이드로도 생산된다면

많은 국가에서

거대한 제철소를 만들 이유는 없을 것이다.


 

실제로 투입된 9천만 명의 농민들은

일자무식에 가까웠고 담금질이 뭔지도 몰랐다.

'이러한 경제건설이 잘 이뤄지면

중국은 영국과 프랑스를

곧 따라잡을 것이고

우리도 잘 살 수 있다.'

선전을 믿고 국가경제 건설에

이바지한다는 뿌듯한 마음으로

사람들은 옫갖 고철과 집에서 쓰던

식기구, 비싼 농기구까지

다 갈아넣으며 철 생산에 집중했다.

 

 

하지만 그들이 생산하는 철은

'똥철'에 가까웠다.

철을 생산한 이래 수천 년간 쌓여오던

철기공의 노하우는 당연히 무시됬고

탄소 함유량 조절, 불순물 제거

그런 과정은 없었기 때문에

생산된 전체 철강 중 1/5만이

1등급 20%이상은 완전 불량품으로 분류되었다.

 

 

하지만 토법고로의 악순환은 계속됬다.

단기적으로 철 생산량은 급증했고

수치상으로는 성공하는 것처럼 보였다.

현지 상황을 모르는 윗선은

급증하는 철 생산량에

무턱대로 할당량을 늘려갔고,

밑에서는 보여주기식으로

사용이 가능한지도 모를

똥철을 계속 생산해갔다.

'생산한 강철로 농기구를 만들기 위함'이었던

목표는 사라져버렸고

똥철을 생산하기 위해

수입해온 농기구를 넣는 지경에 이르렀다.

지속되는 벌목으로

주변의 산들은 점점 헐벗게 되었고

돌봐줘야할 농작물은 버려져 썩어버렸다.

 

이렇게 생산된 철은

일상의 물건들을 심각하게 약화시켰다.

이는 중국 사회주의 문화의 표상이 되어버렸는데,

부엌칼은 휘어지고

농기구의 날은 뚝뚝 부러졌으며

금속 대야는 금이 간 채로 사용됬고

시계는 아무 때 울리기 시작했다.

일선 병사들의 돌격소총은 발사되지 않았고,

10만 개 이상의 방독면은 사용불가 판정을 받았다.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것들 중 일부는 좋은 의도에서 생겨나지.

영화 [쥬라기 공원]의 대사

 

'농촌에서 혁명을 해보자'는

의도에서 시작된 대약진운동은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으로

중국을 대후퇴시킨

마오쩌둥의 대실책으로 평가된다.

문화대혁명과 함께 중국을

20년 이상 퇴보시켜다고 평가되는

대약진운동은 중국 전역에서

3천만 ~ 5천만명이 굶주려 사망하는

2차 세계대전 사망자 숫자와

비슷한 결과를 낳았다.

이를 계기로 추락한 마오쩌둥의 권위는

또다른 비국인 문화대혁명을 낳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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