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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title/인물

[인물] 뒤주에 갇힌 왕자, 사도 세자

by 류군 2022. 7.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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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의 아들인 경종과 영조는

각각 조선의 20대 왕과 21대 왕이다.

연잉군이었던 영조는

인현왕후를 모시는 몸종이자

궁녀의 옷을 빨던

무수리 출신 숙빈 최씨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정통성에 큰 결함이 있었고,

왕위 계승과는 거리가 멀었던 존재였다.


 

경종은 숙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지만

재위 기간 4년 내내

노론과 소론의 정권 다툼으로

잠잠할 날이 없었다.

경종은 병약하여

즉위년부터 배다른 동생인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해둔 상태였는데

결국 자녀를 두지 못했다.

어느 날 게장과 감을 식사로 먹고

식사 직후부터 복통과 설사가

악화되었다고 한다.


 

게장과 감은 궁합이 좋지 않다고 알려져있는데,

게는 해산물이다보니 식중독을 일으킬 수 있고,

감에 들어있는 탄닌 성분이 더해지면

소화불량이 일어나기 쉽다고 한다.

본래 소화기관이 안 좋던 경종에게는

더더욱 큰 일이었을 것이다.


 

결국 경종이 의식불명 상태에 이르게 되고

의관 이공윤은 여러 처방을 해보지만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고,

연잉군은 '인삼과 부자를 급히 쓰도록 하라'

지시를 내리고,

이공윤은 반대하지만

결국 명령에 따르게 된다.

그러자 경종이 점차 안정되는 듯 했지만

얼마 뒤 다시 병세가 악화되고,

결국 사망에 이른다.


 

이러한 배경에서 왕이 된 연잉군, 영조는

두 가지 지울 수 없는 컴플렉스를 가지고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첫 번째로는 무수리의 자식 출신인 것과

두 번째로는 경종 독살 혐의인데,

첫번째는 어쩔 수 없는 문제라고 하지만

두 번째의 경우 게장과 감을

영조가 올렸다는 논란와 더불어

급히 쓰라고 했던 인삼과 부자의 경우

주치의였던 이공윤은 반대하기도 하였고

'부자'는 사약의 재료로 쓰일 만큼

강한 약재였기 때문에 재위기간 내내

영조의 컴플렉스가 되었다.


 

이러한 컴플렉스 때문일까,

영조는 완벽주의자였다.

또한 자기관리에 치중하게 되었다.

모든 식사를 채식 위주로 소식하며

끼니를 거르지 않았고,

하루에 15시간 이상

살인적인 정무를 돌보며 살아갔다.

그렇기 때문일까 역대 어떤 왕보다

깐깐하고 화를 잘 내는 왕이었다는

기록도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영조는

노하다135회 정도 언급되고 있고,

크게 노하다란 언급도 16회 정도 된다.

세종대왕의 노하다란 언급이 16,

크게 노하다라는 언급이 3회 정도 나오는데

비해 훨씬 많다고 볼 수 있겠다.


 

신들이 어제 동궁을 뵈었는데
어린 나이에 예모가 어긋남이 없었으니,
경사스럽고 다행함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영의정 이광좌

 

일찍이 명주와 무명베를 보고
사치와 검소를 구분하여
무명옷을 입기를 청했으니,
매우 기특하다.
영조

 

영조는 42세의 고령 나이에

늦둥이를 맞이하게 되는데

바로 이선, 사도세자이다.

그는 태어난지 4달만에 스스로 기었고,

6달만에 영조의 부름에 대답을 할 수 있었으며,

2살에는 천자문을 배워 60자를 써내었고,

3살에는 비단은 사치이고

무명는 사치가 아님을 말하기도 하였다.

수많은 기록에서

사도세자 이선의 유년시절은

그가 천재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大失所望, 대실소망

아주 허사가 되어 크게 실망함

 

기대가 컸기 때문에 실망도 큰 법이었을까,

영조는 4살 무렵부터

사도세자를 구박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

기대가 컸던 아들인지

더욱 엄격하게 키웠고,

세자가 9살 때

이미 영조를 만나는 것이 두려워졌다고 한다.


숙종릉인 영릉에 가다가 비가 오자 너때문이라 화내는 영조

 

영조는 사람들을 전부 모은 앞에서

어린 아이인 사도세자를 세워놓고

흉을 보고 망신을 주는 일을 자주 하였고

또한 가뭄이나 홍수에도

세자에게 덕이 없어 그렇다고 하였다.

그야말로 정서적으로 학대인 것이다.


선위파동으로 석고대죄하는 사도세자

 

앞서 말했듯이 영조는

두 가지의 컴플렉스가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왕위에 욕심이 없다는 것을

어필하기 위해 '선위 파동'을 일으키곤 하였다.

노론과 소론의 당파싸움이 격해지면

이를 잠재우는 카드로도 활용하였다.

이 방법의 최대 피해자는

사도세자로 후계자의 충성도를

시험하는 의미도 있었기 때문에

선위파동이 일어날 때마다

나가서 석고대죄를 해야만 했다.

실제로 사도는

조선에서 석고대죄를

가장 많이 한 인물로 추정된다.


 

이 밖에도 영조가 사도세자에게

한 부당한 일은 많지만

결국은 사도세자를 병들게 만들었다.

사도세자는 '세자'이었기 때문에

항상 자신을 모시는 수 많은 사람들 앞에서

영조에게 혼나고 모욕당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병세는 악화되었고

결국 돌아올 수 없는 선을 넘고 만다.


세자가 내시, 나인, 종의 신분을 가진 백여명을 죽이고
낙형에 처하는 등 무자비한 정상이 이루 다말할 수 없었다.
[대철록], 상권

 

나는 한 가지 병이 깊어서 나을 기약이 없으니,
다만 마음을 가라앉히면서 민망해할 따름입니다.
1756년 2월 29일 사도세자의 편지

 

사도세자는 폭행, 성폭행, 살인 등의

반인륜적인 범죄를 저지르기 시작했다.

좁거나 어두운 곳에 혼자 있으면

극도로 불안정한 상태가 되는

폐쇄증이 걸렸고,

옷 입기를 어려워하는

'의대증'에 걸리기도 하였다.

결국 사도세자와 영조의 갈등은

최극단에 이르렀다.


 

영조는 사도세자를 폐하는 교지를 내리고

뒤주에 들어가게 하였다.

처음에는 며칠 있으면

풀어줄 것으로 생각하여

부채와 음식도 제공되었으나,

영조가 이를 알고 격노한 뒤

뒤주는 꽁꽁 묵였다고 한다.


 

8일간 뒤주에 갇혀있던 사도세자는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된다.

영조는 기다렸다는듯

다시 세자의 위호를 회복시켜주었는데

정확히는 그 때 '사도세자'

이름을 붙여주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

이전에는 세자, 동궁으로 불렸을 것이다.

'사도'는 사도세자의 죽음을

슬퍼하는 이름이 아닌

'자신의 죽음으로서

과오를 뉘우친'이라는 뜻이다.


사도세자가 그렸다는 [견도]

 

사도세자의 세자빈이 기록한 [한중록]

사도세자 관련 문제에서는

1차사료로 여겨지는데

2014년 울산대학교 의과대학에서

한중록을 분석했는데, 기록되어 있는

사도세자의 정신병 증세가

현대의 정신의학 지식을

가지고 있지않은 사람이

상상력만으로 쓴 허구로 보기에는

어려운 내용으로 평가한 적도 있다.


 

사도세자를 둘러싸고

노론과 서론 당쟁의 희생양이거나

사실은 실패한 개혁가라는 이야기보다는

아버지의 완벽주의적 성향과

컴플렉스로 수많은 질책과

꾸짖음을 지속하다보니 생긴

정신질환에 미쳐버린

불쌍한 세자로 인식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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